나의 평생 소원은 단 세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1907~1954
고난의 상징과도 같은 그녀의 인생
프리다 칼로의 인생은 교통사고, 여러 번의 수술, 남편의 바람기, 그렇지만 계속 된 남편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프리다는 당시 유명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지만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프리다는 그림을 통해 그녀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화려하게 표현하였고,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에는 남편 디에고보다 칼로의 작품이 훨씬 더 주목받게 됩니다. 전통적인 수채화부터 초현실주의 그림까지 그녀의 고향인 멕시코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평생에 걸쳐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운명과도 같았던 그림
프리다 칼로는 15세에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 다니며 해부학과 식물학을 비롯해 생물학 분야에 소질을 보이며 의사가 될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18살이 되던 해 칼로는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교통 사고로 인해 치명상을 입습니다. 전신을 심하게 다친 칼로는 9개월동안 온 몸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깁스를 한 몸으로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프리다 칼로의 침대 위에 전신 거울을 설치해 주었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그림 143점 중 55점이 자화상입니다. 제한된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칼로는 수 차례 수술 후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평생을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이러한 고통을 그림 속에도 적극적으로 담아냅니다.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칼로는 자신의 그림을 정확히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리베라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중략)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라는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평은 칼로가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더 단단하게 해주었습니다.
프리다칼로의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니콜라스 머레이
칼로는 1937년, 보그 10월 호에 '멕시코의 세뇨라스 Senoras of Mexico'라는 특집 기사에 실렸습니다.
그 후 1938년 칼로가 뉴욕에 머무르며 작품 전시회를 하는 동안 유명한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Nickolas Muray를 만나게 되었고 보그지 표지에 실리게 되는 사진을 찍게 됩니다. 프리다 칼로의 유명한 초상 사진의 대부분은 니콜라스 머레이의 작품입니다.
머레이는 프리다의 사진을 약 90여 점이나 찍었습니다. 그는 프리다를 나의 '소치틀(꽃)'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리다는 이런 그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둘은 곧 사랑에 빠집니다.
프리다 칼로가 평생을 의지해온 남편 디에고가 그녀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되자 무너지는 마음을 따뜻한 그에게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가 찍은 프리다의 사진, 그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프리다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듯 따뜻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평생을 고통에 시달린 그녀도 그의 사진에서는 웃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10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프리다는 디에고의 관계를 끝내 끊어내지 못합니다.
머레이는 "당신은 디에고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고, 우리 둘이 있을 때에도 셋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며 그녀를 떠납니다. 프리다가 디에고와 재결합했을 때도 머레이와 연인 관계를 지속하기도 했고, 머레이는 프리다를 떠난 후에도 생활이 어려워 진 프리다의 그림을 사서 다시 돌려주는 등 셋은 지난한 관계를 지속하였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이런 니콜라스 머레이에게 <물이 내게 준 것>이라는 작품을 선물합니다.
욕조 속 고인 물에는 부모님의 결혼식 장면, 멕시코 전통 의상, 해골, 익사한 나체의 여성, 폭발하는 화산, 죽은 새 등 그녀의 내면의 감정과 고통을 나타내는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프리다 칼로의 푸른집
미래의 남편일 될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난 것은 칼로가 다니던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서였습니다.
당시 33세였던 리베라는 학교 극장의 벽화를 작업하던 중이었습니다. 칼로가 사고를 당한 후 그린 그림을 여러 차례 평가해 주며 칼로와 리베라 사이에서 사랑이 싹텃고, 1929년 칼로와 리베라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 때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었고, 그 이후 삶에서도 전통 의상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코요야칸에 위치한 푸른집에서 함께 살게 됩니다.
그녀의 삶과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가득합니다.
당시 멕시코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급진적인 정치 운동에 관여하게 된 칼로는 1937년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쫓기고 있던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그의 아내 내털리 세도바를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숨겨줍니다. 칼로 부부는 집의 보완을 강화하여 위험에 처한 트로츠키 부부가 식물로 꾸며진 안뜰에서 편안히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에 더해 더 확실한 보완을 위해 집 주변 대지를 추가로 매입하여 정원의 규모만 200제곱미터에서 1,000제곱미터로 확장 할 정도로 배려하였습니다. 확장한 정원을 둘러싼 담에 회반죽을 바르고 선명한 코발트 클루를 칠했는데 이때부터 코요아칸의 집이 푸른집‘La Casa Azul’으로 불렸습니다.
칼로와 트로츠키는 서로 강렬하게 이끌렸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37년 1월 푸른집에 들어 온 뒤 7월 서둘러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1938년, 칼로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유명한 뉴욕의 레비Levy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를 방문했고 프랑스 정부가 그녀의 작품 <프레임>을 매입합니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매입한 첫 20세기 멕시코 화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 임박해지자 칼로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고, 푸른집에서 다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혼란 속에서 그녀의 예술성 창조성이 불타오르고 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칼로는 많은 작품 속에 푸른 집의 정원을 담았습니다. 부겐빌레아와 시계꽃, 용설란, 선인장, 유카 등의 식물은 그녀의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2004년, 이 라 까사 아줄의 방 하나가 열렸습니다. 1958년 디에고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방을 50년간 봉인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 방에는 6천 점이 넘는 사진을 비롯해 프리다 칼로의 옷, 장신구, 화장 도구, 편지들 등 2만2천여점의 자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생이여 만세! (Viva La Vida)
1940년대 말부터 칼로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게 됩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1953년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고,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로는 침대에 누운채로 전시회장으로 나가 축하연에 참여하였습니다.
1년 후 푸른집에서 칼로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작업한 작품은 수박 정물화였습니다.
수박에 새길 글자는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입니다.
칼로가 죽은 뒤 리베라는 '푸른집'을 나라에 기증했고, 그 집은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예술가 들여다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0) | 2022.11.09 |
---|---|
색으로 숭고미를 담은 화가, 마크 로스코 (0) | 2022.11.09 |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 (0) | 2022.11.08 |
지중해의 빛을 눈부시게 담아낸 화가, 호아킨 소로야 (0) | 2022.11.07 |
황홀한 색채의 마술사, 마리 로랑생 (0) | 2022.1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