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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들여다보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

by crystalpalace 2022. 11. 8.

 

프랑수아 부셰
1703~1770

 

유럽 전역에 '프랑스풍'을 전파시킨 화가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셰는 화가인 아버지, 역사화가 르무안느(Lemoyne)와 베르네제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배웠습니다. 1723년에 아카데미의 로마상에 도전, 수상하게 되어 포상으로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1727~1731년 5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베르사유궁 왕비의 방, 오텔 드 수비즈 살롱의 장식등을 도맡아 작업하는 등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특히 퐁파두르 부인의 적극적인 지지로 벽화, 회화뿐만 아니라 타피스트리 밑그림도 상당히 많이 그리며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로코코는 조약돌을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18세기 절대왕권의 군주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후, 화려하지만 남성적인 바로크 양식이 점점 쇠퇴했고, 경쾌하면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이 단어는 당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1700년 경 프랑스 예술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의 주요 흐름은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다른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로코코는 프랑스가 만들어 유럽의 문화적 유행을 전파시켰습니다. 이는 중세 고딕 이후 오랫만에 찾아온 문화 예술적 주도권으로 20세기까지 유럽 다른 국가에 대한 프랑스의 문화 예술 주도권이 이어졌습니다. 

 

 

18세기는 '프랑스의 세기'로 불렸습니다. 

이 시기 유럽이 받아들인 가장 '프랑스적인 것'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바로 부셰의 그림이었습니다. 부셰는 그림을 통해 프랑스 모든 계층에 궁정의 문화를 퍼뜨리고, 유럽의 전역에 '프랑스풍'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인상을 만들었습니다. 

부셰는 로코코 시대의 가볍고, 밝고, 호화스럽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장식적인 특징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함으로써 궁정, 귀족, 상층 부르주아 뿐만 아니라 서민에게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

프랑수아 부셰에 관해 이야기 할때 마담 퐁파두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당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공식적인 정부 생활은 1745년부터 1750년까지 5년에 불과합니다. 짧은 기간에도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며 루이 15세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자 연인으로 그 당시 왕실을 방문하는 귀족들의 옷, 장신구, 에티켓, 음식 문화까지 모든 유행을 선도하였습니다.

퐁파두르의 복식은 퐁파두르 스타일이라는 고유 명사를 남길 정도로 로코코 양식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부셰는 퐁파두르의 사랑스러운 장미빛 볼, 하늘거리는 옷자락, 섬세한 레이스 등을 눈 부시게 담아냅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예술과 학문분야에도 막대한 후원을 하였습니다. 유명 살롱을 드나들며 계몽주의자, 예술가, 학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살롱은 응접실이라는 뜻으로 17세기부터 귀족 부인들이 자신의 응접실에 지식을들을 초대해 토론하고 교류하던 것이 살롱 문화로 발전하였습니다. 18세기까지 살롱이 프랑스 문화의 흐름을 선도했지만 19세기부터 카페가 살롱의 뒤를 이어 토론의 장이 되었습니다. 철학자 디드로가 주도해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과 같은 계몽 사상가들이 참여한 백과사전 제작도 그녀가 후원하였습니다. 1772 35권의 백과사전이 완성되었고,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으로 18세기 새로운 지성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는데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고급 도자기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루이 15세의 지지를 받아 도자기 공방을 뱅센에서 베르사이유와 가까운 세브르로 옮기고, 공방을 왕립 도자기 제작소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원 풍경, 꽃 등을 그려 넣은 화려한 도자기를 생산합니다. 이 세브르 도자기에 주로 사용한 밝은 분홍빛을 퐁파두리 장밋빛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세브르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유럽 도자 역사상 최고의 예술성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의 초상화 배경에는 그녀의 관심사였던 책, 악보, 피아노, 도자기, 기타, 백과사전 등이 등장하여 그녀의 학식과 교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루이 15세가 퐁파두르의 파리 저택으로 구입한 오텔 데브뢰(Hotel d’Evreux)가 현재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전입니다. 너무 부르주아적이고 경박하다는 이후로 대통령의 부인 중 엘리제 궁전을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혁명 이후 명성의 몰락과 회복

부셰는 평생 회화 1천점, 드로잉 1만 점을 제작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평생 지속하였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명성을 지속하며 로코코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었지만,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아 그림의 가치는 완전히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부셰의 그림은 귀족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왕실, 구체제와 동일시되었고, 대혁명 기간에 퐁파두르 부인이 미술품으로 치장한 성과 부셰의 그림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후 신 고전주의가 아카데미의 정통이 되자 낭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로코코가 보여준 자유로움을 옹호하고 부셰의 그림 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세기 귀족 문화의 절정기를 그리워 하는 상류 계층들은 여전히 그의 그림을 사들여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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