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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들여다보기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by crystalpalace 2022. 11. 9.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마르크 샤갈의 탄생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Ghetto)에 살며 차별과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유대인 거주지의 교육은 낙후되어 있었으며 취업, 토지 소유 등은 제한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상업, 수공업 등 한정적인 직업만 가질 수 있도록 정해져있었습니다.

19살이 될 무렵 화가의 꿈을 꾸던 샤갈은 고향 비테프스크를 등지고 샹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합니다. 당시 유대인이 러시아의 수도인 샹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려면 체류 허가증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그가 체류 허가증이 있을리 만무 했지만, 다행히 유대인 변호사 골드베르크를 만나 그의 하인으로 등록해주면서 정식으로 체류허가증을 받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한 샤갈은 꿈을 이루기 위해 왕실협회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수업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자퇴한 뒤,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즈반체바 학교에 입학합니다.

이 학교에서 19세기 중반부터 펼쳐진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 등의 작품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갈 목표를 세웁니다.

 

샤갈은 원래 러시아 이름 모이세 하츠켈레프를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위해 큰 걸음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크 샤갈로 개명합니다. 그리고 파리의 미술관과 전시를 열심히 다니며 인상주의 모네, 반 고흐, 마티스의 그림뿐만 아니라 렘브란트의 빛 연출 등 다양한 표현법들을 흡수하고 익혀나갑니다.

마르크 샤갈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사람들은 파리에서 습득한 야수주의, 입체주의의 기법들과 유대인의 감성의 복합체라고 평가합니다. 샤갈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둥둥 떠다니는 사람은 샤갈의 신앙인 유대교의 하시디즘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사람이나 천사가 길 위를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융합의 결정체가 1911<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으로 탄생합니다.

나와 마을, I and the Village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1914년 샤갈은 누나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방문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어쩔 수 없이 8년 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연인 벨라와의 사랑을 담은 걸작들이 탄생합니다.

 

샤갈과 그의 와이프 벨라

 

샤갈은 첫 아내 벨라를 열렬히 사랑하며 3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벨라는 부유한 보석상의 막내딸로 풍족하게 자란데다다, 러시아 여성의 3%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모스크바 게리에르여자대학교를 입학한 수재였습니다. 그녀는 샤갈을 만나고 배우의 꿈을 접고 샤갈과 결혼하였습니다. 부부는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1944년 벨라가 급성 감염으로 미국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벨라가 죽자 샤갈은 한 동안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붓까지 손에서 놓게 됩니다.  그녀가 죽은 뒤 9개월, 샤갈은 <그녀 주위에 Autour d’elle>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벨라와의 만남부터 결혼까지 추억이 가득한 고향 비테프스크를 중심으로 젊은 벨라는 눈물을 닦고 있습니다. 반대쪽에는 벨라를 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거꾸로 그렸습니다. 차마 그녀를 떠나 보내지 못하고 슬픔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 주위에&nbsp; Autour d&rsquo;elle 1945

 

그러나 다행히 두 번째 아내 바바를 만나 활기를 되찾았고, 또 30여년을 그녀와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샤갈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들에는 그의 첫번째 아내 벨라가 주로 등장하지만 두 번째 아내 바바를 위한 그림도 있습니다. 

 

 

바바를 위해 Pour Vava

 

유대인 샤갈의 삶과 정신을 담아낸 그림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에서 국민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독일 수상 자리에 오른 히틀러는 그 악랄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말살 정책)을 실행합니다. 유대인인 샤갈 역시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40년 미국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었던 비테프스크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고 어린시절 친구과 가족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젊은 시절 샤갈이 사랑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주로 그렸다면, 이러한 비극 이후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비극을 그려 고발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샤갈은 <구약 성경> 삽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성경 그 자체이며 정신입니다. 구약 성경은 유대인 샤갈의 삶을 이끌어준 정신적 지주이자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105가지 장면으로 간추리고 26년간 동판 작업을 지속하였습니다. 43세의 나이에 시작한 이 작업은 69세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고 105점의 동판화가 담긴 구약 성경을 출판해 냈습니다. 또 이 105점의 이야기를 12점에 집약하여 <성서이야기>에 담아내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는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1973년 니스의 샤걀 미술관이 개관했고, 그 곳의 주인공은 열 두점의 성서 이야기 였습니다.

1977년 샤갈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고, 생존화가로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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