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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들여다보기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 폴 고갱

by crystalpalace 2022. 11. 16.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안락한 가정 생활에서 화가를 꿈꾸다

폴 고갱의 본명은 외젠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으로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습니다. 클로비 고갱은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불행과 함께 시작한 리마에서 보낸 시기 1849~1854년 동안 고갱의 가족들은 아버지도 없이 타지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받아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됩니다.

 

고갱은 증권거래점의 점원으로 일했으며, 1873년에는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에밀(1874), 알린(1877), 클로비(1879), 장 르네(1881) 폴(1883) 5명의 아이를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무렵부터 고갱은 그림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였습니다. 27∼28세부터는 '일요화가'로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습니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였고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습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위해 결심하였고,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교류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금방 화가로서 성공할 것만 같았던 기대감과 달리  화가로 살아가면서 고정 수입이 없어지자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코펜하겐에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담다

파리에서 가족도 없이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하는 '햇빛 아래 풍경'을 버리고 점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구축해 나갑니다. 또 이 때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토기에서 비롯된 '원시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으로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됩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고갱과 고스는 둘 다 비교적 늦게 그림을 시작했고 거의 혼자서 그림 공부를 했다는 점이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이 성향은 무척이나 달랐고 잘 알려진 데로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후 둘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고갱은 많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이 커져가 유럽을 완전히 떠나 소박한 삶을 찾아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섬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단순히 기교나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무언가를 갈망했습니다. 

 

제 2의 고향, 타히티

고갱은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서양의 문명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타히티의 원주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그 곳 주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야만적'인 색채와 때묻지 않은 자연과 사람들을 담아냅니다.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처음 접한 친구들은 당황했고, 그는 자신이 '야만인barbarian'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단지 낯설고 이국적인 대상만을 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럽 미술에서 보여온 기교와 기술들을 버리고 단순함, 순수함, 솔직함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Ia Orana Maria (Hail Mary) (1891)

 

 

Te tamari no atua, 1896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116.05 x 134.62 cm Albright Knox Art Gallery

고갱은 그 당시 유럽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주 어린 애인을 두었습니다.

타히티에서 그는 13세의 Tehura와 14세의 Titi, Pahura 및 Vaeoho와 같은 4명의 어린 소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고갱은 식민주의적 행동과 유럽식 사고방식을 혐오한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기 때문에 말과 행동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893년 6월 4일 타히티를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893년 11월 10일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습니다. 고갱은 자신이 경험한 타히티섬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고,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소개를 위해 그림을 목판으로 제작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람들의 무관심을 돌릴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그는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코펜하겐의 그의 가족들 조차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고갱은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타히티로 향했습니다.

 


타히티에 돌아온 고갱은 고독과 절만, 질병과 궁핍으로 쓰러져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때 자신의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Paul Gauguin - Where do we come from ? What are we ? Where are we going ? [1897]

 

그의 작품은 프랑스 아방가르드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같은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폴 고갱은 평생을 외로움속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현재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화상

 

고갱의 그림 '언제 결혼 할 건가요 when will you marry?'는 2015년 3억 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예술작품이었습니다.  

 

When will you Marry?, 1892, 101 x 77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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