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네의 무의식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자네의 의식에 관심이 있네”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광기와 천재 사이, 초현실주의자
초현실주의는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려는 화가들을 지칭합니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 있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라고 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조하였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새로운 생각들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열망했습니다.
살바토르 달리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천재’라고 명명하며 기행적인 행동을 즐겼습니다.
어렸을 때는 담비 망토에 왕관을 쓴 여왕 차림으로 다녔으며, 고층 건물에서 직접 중력을 체험하기 위해 뛰어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중 미술사 시험을 보다가 "내가 심사위원보다 이 문제의 답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답을 쓸수 없다"라고 써서 퇴학당하기도 합니다. 파리에 방문 했을 때는 개미핥기 두 마리를 강아지처럼 묶어 길거리에서 산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정상'적인 모습을 찾기가 힘들정도입니다.
살바토르 달리는 그야말로 초현실주의 자체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앙드레 부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살바토르 달리의 작품 세계
달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상주의와 르네상스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고, 점차 임체파와 아방가르드 운동에 빠졌습니다. 파리에서 머물며 피카소를 포함해 르네 마그리트, 폴 엘뤼아르, 앙드레 부르통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그룹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달리는 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관찰되는 기법으로 한 가지 형태로 여러 가지 사물을 연상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인데, 각각의 색채나 형태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한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달리의 작품은 1920년대~1930년대의 초현실주의부터 1960년대~1970년대 팝 아트 시대에 걸쳐 있습니다. 다만 달리 자신은 하나의 사조로 정의되는 것을 거부했고, 스스로를 ‘천재’라 칭했습니다.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꿈, 잠재의식, 섹슈얼리티, 종교, 과학 및 그의 가장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포함합니다. 달리는 당시 인기있는 심리학자였던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스의 변형> 그림을 가져가 정신 감정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그림은 런던 테디트 갤러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장품 중 하나입니다.
달리는 스페인 내전(1936~1939) 동안 파리에서 머물렀으며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1948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가톨릭 신앙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고전주의, 신비주의 및 최근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핵 신비주의"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갈라와 포르트리가트의 집
갈라 달리(Gala Dali, 1894-1982)는 살바도르 달리의 부인이자 뮤즈였으며, 매니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달리는 갈라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갈라는 성모, 나체의 여인 등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달리는 작품에 자신의 이름 대신 때때로 'Gala Salvador Dali'라고 서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갈라는 요란하게 연애를 하고 있읐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었지만 10년 연하의 달리를 만나자마자 남편과 딸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술계에서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남편의 주위에도 오지 못하게 하고 돈 관리를 직접 하면서 "기생충", "불쌍한 달리가 마녀에게 홀렸다", "돈에 환장한 여자" 등 악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달리는 평생을 그녀만을 위해 헌신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대부분이 갈라 당신의 피로 그린다
달리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포르트리가트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곳은 달리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자 달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평생 단 한명의 여인 갈라와 오랜 시간 함께 보냈습니다.
1930년 달리는 포르트리가트 해변의 조그만 오두막을 샀고, 그 이후 50년간 총 10채의 오두막을 더 구매합니다.
그리고 이를 합쳐 해변가 절벽을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집과 정원을 가꿉니다.
포르트리가트의 집은 모든 방에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만들어졌고, 방마다 이름도 붙였습니다. 이 곳의 집과 정원은 갈라가 도맡아 관리했습니다.
달리는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해안가 빛을 예찬했습니다. 집 한편에 작업실을 지어 빛이 가득 들어오도록 큰 창을 내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는 매해 겨울 뉴욕과 파리를 여행하며 보냈고, 4월~5월쯤 포르트리가트로 돌아왔습니다. 달리는 이 곳의 풍경을 실제 작품의 배경으로 활용했고, 넓은 정원에서 작품을 전시하거나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달리는 그김 작업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연극,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1945년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의 미술 작업에 참여해 꿈과 환각의 풍경을 디자인하기도 했고,
잘 알려져있듯이 1969년에는 츄파춥스 사탕 포장지의 데이지 꽃 모양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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