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제도권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내게 일반적인 사회 규칙들은 통용되지 않는다
타마라 드 렘피카
Tamara de Lempicka
1898(추정)~1980
생계를 위해 시작한 그림으로 유명인사가 되다.
타마라 드 렘피카의 본명은 타마라 로잘리아 거르위-고르스카로 폴란드 바르샤바 / 또는 모스코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유럽여행을 다니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접했으며, 스위스 로젠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모의 이혼 후 그녀는 이모가 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러시아의 변호사이자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던 테데우즈 렘피키를 만나 결혼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냅니다. 그러나 남편이 볼셰비키 혁명에 연루되어 총살 위기에 처했다가 천신만고끝에 파리로 망명하게 됩니다.
러시아에서는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남편은 파리에서 이방인의 위치에 적응하지 못했고, 어린 딸을 키워야 하는 타마라는 본인의 재능을 살려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름을 ‘타마라 드 렘피카’로 바꾸고 그랑드 쇼미에르 미술 아카데미Academi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면서 파리 예술계 인사들과의 친분을 쌓아갑니다. 당시 피카소의 큐비즘이 호평을 받던 시기였는데 타마라는 평소 좋아했던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에 큐비즘 양식을 섞어 그림으로써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 나갔습니다. 충출한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에 인간적인 매력도 넘쳐났던 타마라 드 렘피카는 곧 유명 인사가 되었고 파리 주요 살롱에서 작품을 전시합니다.
1925년 밀라노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총 28점의 작품을 전시하였고, 1927년 보르도 국제미술전에서 딸 키제트를 그린 그림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로 1등 수상의 영예을 얻으며 성공 가도를 걷게 됩니다.
당당한 여성을 상징적으로 그리다
타마라 드 렘피카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자화상, 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Autoportrait, Tamara in a green Bugatti> 입니다. 이 그림은 독일 여성잡지 <디 다메Die Dame>의 표지 그림을 주문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1978년 뉴욕 타임즈에서는 '기계시대의 강출의 눈을 가진 여신"이라고 평했습니다.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는 여성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한 여성의 자의식과 여성 해방의 상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여성들의 지위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 전까지 생산 활동에 크게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들은 전쟁 전후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군수산업, 의료산업, 석탄 산업 등에 종사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단순노동에서 시작해 점차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기계 조작과 같은 복잡한 작업에 여자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생산적인 능력을 깨닫고 사회적인 지위를 자각하게 됩니다.
타마라의 자화상은 신여성의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이처럼 향상된 여성의 자의식과 함께 여성 자치권, 사회적/기술적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운전대를 직접 잡은 여인,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주체적인 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영어명은 'Auto-portrait'
또 그녀의 당당한 여성성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입니다.
20세기 초까지도 회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약하고, 사랑스럽고, 청순하고, 온순하거나 때로는 남성들을 위해 관능미를 뽐내는 이미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키제트는 짧은 커트머리에 차가운 눈빛, 반항적인 몸짓을 하고 있음으로서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에서 탈피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였습니다.
타미라의 그림은 소프트 큐비즘Soft Cubism으로 평가됩니다. 마치 마네킹 같이 매끈하고 음영이 강하게 드러나도록 표현된 여성은 이전의 여성 초상화들에 등장하는 부드럽고 여린 여성의 모습과는 달리 당당하고 강렬하며 의지로 가득차 보입니다.
아르데코의 여왕의 몰락과 재기
아르데코는 1920~1930년대 서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건축과 장식 미술 양식으로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연속적인 곡선을 강조한 것과 달리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 방식을 고려하여 기능적이고 직선미를 추구하였습니다. 아르 누보가 엷은 색조를 주로 사용하였다면 아르데코는 검정, 회색, 녹색의 조합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렘피카는 각진 선들과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 형태를 적절히 조합하여 화면을 구성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부드러운 입체주의'라고 불렸으며, 아르데코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눈길을 사로 잡는 미모와 당당한 태도로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타마라는 1928년 남편과 이혼하고 1933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라울 쿠프너 남작과 재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붓을 든 남작부인’이라고 불린 그녀는 곧 미국의 에술, 패션 잡지에 소개되면서 금세 자리 잡아 예술적 성공, 사회적 성공 모두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러나 1950년대 추상회화가 유행하게 되자 그녀의 그림은 곧 유행에 뒤쳐지게 되고 사람들은 곧 그녀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녀도 추상회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1973년, Paris Palais du Luxembourg에서 그녀의 회고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가 대성공을 이루며 그녀의 그림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됩니다. 헐리웃의 많은 셀럽들이 그녀의 그림에 환호했으며 패션계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마돈나는 렘피카의 그림을 너무 좋아해 그녀의 노래 "Vogue"의 뮤직비디오에 렘피카의 이미지를 넣었으며 하퍼스 바자에서는 그녀의 초상화를 패션으로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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