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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들여다보기

삶과 예술에서 '나'를 세우다, 가브리엘레 뮌터

by crystalpalace 2022. 11. 10.

 

인간에 대한 존중 없이 진정한 초상화는 불가능하다

가브리엘레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862

 

 

칸딘스키와의 만남, 독일 여성 화가의 탄생

가브리엘레 뮌터의 부모님은 아메리칸드림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독일에서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치과와 상점을 운영하며 큰 돈을 모았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리를 잡았지만 미국 남북전쟁이 터지자 1864년 고향 독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개척적인 삶을 살아온 뮌터의 부모님들은 당시 유럽의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사회분위기와 달리 뮌터를 남녀 구별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키웁니다. 뮌터는 당시 여성에게 흔치 않던 자전거를 즐겨 탓으며, 여성이 공식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던 시절 개인 교습을 통해 미술을 배워나갔습니다.

 

뮌터가 9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살 무렵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미국에 있는 고모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3년간 미국에서 보내며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카메라로 수많은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화가를 꿈꾸며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돌아갑니다.

 

파리의 몽마르뜨르가 서유럽권 예술가들의 중심지였다면 뮌헨의 슈바빙은 동유럽권 예술가들의 중심지였습니다. 동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이 미술, 문학, 철학 분야를 넘어 토론을 나누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으로 파리와 마찬가지로 뮌헨에서도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 예술가와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려는 진보 예술가들의 각축장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큰 흐름 사이에서 칸딘스키는 팔랑크스 전시협회를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새워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학생을 받았고, 이 때 뮌터는 칸딘스키가 세운 학교에 들어가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뮌터의 독창성과 재능을 발견한 칸딘스키는 그녀가 스스로 재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사랑과 예술이 무르익은 무르나우의 집

칸딘스키와 뮌터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곧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칸딘스키의 아내가 있는 뮌헨을 떠나 5년간이나 튀니지,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 하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이어나갔습니다.

 

 

칸딘스키와 뮌터

 

 

1908년 바이에른의 무르나우에 집을 매입했는데 이 곳에서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화가, 작가, 음악가들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집에서 칸딘스키는 5년 간 여행으로 다져진 영감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눈으로 보는구상회화가 아닌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추상회화로 발전시키며 칸딘스키만의 화풍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칸딘스키, Man at the table (Kandinsky),1911, 51×68 cm

 

뮌터는 바이에른 지방의 글라스 페인팅의 과감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에서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억눌린 내면의 잠재된 표현 욕구를 원색의 자유로운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미술 운동)를 추구하게 됩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추상적인 실험에 따라가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항상 열려 있었던 그녀는 동판화, 석판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기법들을 실험했습니다.

 

 

 

뮌터가 제작한 칸딘스키의 초상, Portrait de Kandinsky,  1906, colour woodcut 25.9 x 19 cm

 

 

 

 

 

뮌터와 칸딘스키가 만든 집과 정원은 두 사람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고 친구와 동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청기파Der Blaue Reiter파의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순수한 영혼성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자유로운 기사라는 낭만적 모티프까지 청기사에는 당시 칸딘스키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였고 칸딘스키는 뮌터에 대한 사랑이 식어 러시아로 떠나 버립니다. 1917, 51세의 칸딘스키는 자신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모스크바 장군의 딸 니나 안드레브스키와 결혼하며 배신의 일격을 다시 한번 가합니다. 배신감에 깊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뮌터는 다행히 베를린에서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하네스 아이히너를 만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게 됩니다.  새로운 동반자 요하네스와 다시 무르나우로 돌아온 뒤 그곳에서 본 30년 동안 생애 가장 활발한 작업 활동을 합니다. 다시 붓을 잡은 그녀는 표현주의로부터 벗어나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였습니다. 

 

 

Girl with Doll, 1909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뮌터의 그림은 Lady in an Armchair, writing 입니다. 

세련되고 우아한 스타일의 여성이 암체어에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도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지금 입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우아한 옷, 살짝 웨이브가 있는 짧은 머리, 가지런히 모은 발에 빨간색 플랫슈즈는 저도 신고 싶을 만큼 쉐입이 예쁩니다. 정말 이대로 따라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스타일입니다. 

무릎위에 살포시 올린 하늘색 노트에 빨간색 펜이라니.. 많지 않은 요소 하나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Lady in an Armchair, writing,1929

 

 

뮌터의 그림에는 특히 당당하고 세련된 여성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Fräulein Ellen im Gras  [Miss Ellen on the Grass], 1934, 47.5 × 65 cm

 

 

Sinnende  [Woman in Thought], 1917, textile support, 66 × 99.5 cm

 

 

청기사파의 창립회원으로서 끝까지 지키다

뮌터와 아이히너는 청기사파의 탄생지였던 무르나르의 집과 정원을 열심히 가꾸었고, 이제 거장이 된 칸딘스키가 젊은 시절 머물렀던 공간으로 잘 보존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레 뮌터와 요하네스 아이히너 재단Gabriele Munter and Johannes Eichner Foundation을 세워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잘 관리되도록 하고 자신의 작품도 모두 재단에 남겼습니다.

 

무르나르의 집

 

 

"Russian house" in Murnau, 1931, 42×57 cm

 

 

195780세의 노인이 된 그녀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100여 점의 청기사파 작품을 모두 기증합니다. 마르크, 야블렌스키, 베레프킨, 마케 등 청기사파 화가들의 걸작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청기사파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하고. 발각 즉시 불살라버렸는데 뮌터는 무르나우 집 지하실에 작품들을 숨겨놓고 전쟁동안 지켜 온 것입니다.

그녀의 든든하 수호 아래 청기사파의 소중한 그림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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