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추한 것을 지우도록 되어 있다.”
라울 뒤피 Raoul Dufy
1877~1953
이 치마를 입고 화실에 그림을 그리러 간 날,
“어머, 치마가 라울 뒤피 그림같아~”
그 뒤로 이 치마를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라울 뒤피의 그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경쾌함이 있습니다. 이 옷을 입을때마다 그 발랄하고 쾌할하며, 리듬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입는 기분이 듭니다. 실제로 라울 뒤피도 직물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했지요.
다양한 사조를 거쳐 뒤피만의 화풍을 발전시키다
라울 뒤피(Raoul Dufy)는 1877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대가족 아홉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14세 때 커피 수입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야간에는 르 아브르 시립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1900년 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는 레옹 보나(Léon Bonnat)의 작업실에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의 초기 작품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와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의 회화에 가까운 경향을 보입니다. 그 기간 동안 뒤피는 대부분 노르만 풍경을 수채화로 그렸습니다.
뒤피는 1905년에 열린 앙데팡당전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사치, 평온, 쾌락”(1904)을 보고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새롭게 발견한 야수파의 양식에서 큰 영향을 받은 그는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검은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1906년과 1907년 야수파 전시에 참여했다. 이 전시를 통해 대담한 색채와 급하게 그린 표현적인 인물의 묘사를 통해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에게 영향을 준 화파는 야수파였습니다. 야수파는 작품에서 밝은 색상과 대담한 윤곽을 강조했습니다. 뒤피는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강렬한 원색과 짙은 윤곽석의 특징을 담은 그림을 그렸으며, 1920년 또 다른 스타일인 큐비즘에 잠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이후 뒤피는 자신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뒤피의 그림은 기존의 야수파 그림에 비해 옅은 색으로 빠르게 그려낸 선이 특징적입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의 낙관적이고 세련되고 장식적이며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져 라울 뒤피만의 즐거움이 가득한 화풍을 구축하였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을 담은 그림
뒤피의 그림 소재는 다양합니다. 쾌활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의 유화와 수채화는 요트 장면, 프랑스 리비에라의 반짝이는 전망, 세련된 파티, 음악 행사 등 당시의 이벤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여성 누드, 목욕하는 사람들, 연회, 뱃놀이, 경마장, 요트경기, 서커스, 투우, 오케스트라, 산책길의 풍경, 해변, 창이 열린 실내 등 모두 당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특히 그는 야외 사교 행사 장면으로 유명합니다. 간결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에서는 반짝이는 햇빛아래 경쾌한 파티 음악이 들여오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여류작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뒤피의 작품, 그것은 쾌락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직물 디자인과 장식미술분야로 확장
1909년 뒤피는 뮌헨을 방문하여 독일 표현주의와 뮌헨의 장식미술을 보고 활동 분야를 확장시켰습니다. 곧 그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상업 예술가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10년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이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직물디자인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패션 뿐만 아니라 도자기, 판화 제작자, 벽지무늬, 창의 장식, 책 삽화가, 풍경 디자이너, 가구 디자이너, 공공 장소 기획자이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뒤피는 장식미술 분야에서 활동범위를 더 넓혀 장 콕토(Jean Cocteau)를 위한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상업주의에 빠져버린 화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예술과 산업시대 상품의 조화를 추구한 아르누보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5년에 뒤피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벽에 거는 장식품과 도자기 분수반을 전시했고, 그의 작품들은 박람회의 다른 전시작들과 함께 아르데코 양식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2년 뒤인 1937년에 다시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뒤피는 <전기의 요정>이라는 프레스코 벽화를 출품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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