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가 들여다보기

파리에서 아르누보를 꽃 피운, 알폰스 무하

by crystalpalace 2023. 1. 4.

사라 베르나르와 만나 완성한 '무하 스타일'

 

알폰스 무하의 성공을 이야기 하기 전에 벨에포크의 상징과도 같은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조르주 쥘 빅토르 클래랭, 사라 베르나르(1844~1923)의 초상, 1876, 캔버스에 유채, 250 x 200㎝,  파리 시립 미술관 프티 팔레 소장.

 

 

사라 베르나르는 벨 에포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이자 평생을 연기에 바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부자 애인을 거느린 쿠르티잔Courtisane의 딸로 태어났으나 파리의 유명한 국립극단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 에 들어가 연기를 공부합니다. 

젊은 여성이 혼자 살아가기 힘든 시절, 20대에 벌써 연예, 출산, 싱글맘까지 겪은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다시 일어나 재기합니다. 

이러한 베르나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대중에게 어필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배우로서, 인간적인 면모를 어필함과 동시에 치밀한 전략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며 대체불가의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특정 역을 맡을 때마다 그 역의 이미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의상과 액세서리를 직접 준비했는데,

이때 알폰스 무하와 르네 랄리크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최초로 자신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팔았던 연예인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들이 다양한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듯,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초상화, 브로셔를 팔았으며

비누, 분, 화장품, 술 등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여배우들이 꺼리던 남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맡았던 '햄릿'은 큰 화재를 불러 일으키며 수많은 여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전 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에밀 졸라, 오스카 와일드 등 당대 작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예술가들의 뮤즈이자 슈퍼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알폰스 무하는 우연한 계기로 이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공연 포스터를 그리게 됩니다. 

 

1894년 크리스마스 이브,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제작을 전담하고 있는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직원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 있었습니다. 

사라 베르나르는 다음 해 첫 공연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얼마 남지 않는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재제작을 요구했고, 그날 인쇄소와 그 주변 일대를 통틀어서도 유일하게 남아 작업을 하고 있던 작가 알폰스 무하에게 어쩔 수 없이 포스터 제작을 의뢰하게 됩니다. 

 

이렇게 급하게 작업한 지스몽다 포스터는 지금까지의 베르나르 공연의 포스터와 다르게 성스럽고 압도적이며 아름답기까지하였으며, 

베르나르는 무하의 스타일에 단숨에 빠져버리고 그 당시 매우 파격적으로 6년 전속 계약을 맺게 됩니다. 

 

아르 누보의 아이콘 '알폰스 무하'의 스타일은 이렇게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 것은 무하의 성실함과 꾸준함이었습니다. 

 

 

 

 

아르누보를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자

무하 스타일로 대표되는 아르누보는 자연에서 모티브를 찾아 표현합니다.

잎사귀, 나무, 덩굴, 동물, 곤충, 꽃 등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유리, 타일, 철물과 같은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합니다. 

 

 1902년에 무하는 '장식 자료집 Documents decoratifs '라는 책을 발간하며 장식 패널, 창문, 도자기, 가구, 귀금속, 포스터 등에 적용되는 아르누보 양식의 예술적 장식에 필요한 지식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였습니다.

무하는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아르누보의 아름다움이 특권층만이 누리는 그들만의 세계에 갖히는 것을 거부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본인이 발견하고 구축한 아르누보 예술의 세계를 거리낌없이 공개한 것입니다. 

 

장식 자료집 Documents Decoratifs

 

 

아름다운 아르누보 풍의 그림과 장식들은 산업화로 늘어난 신흥 부르주아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기였음으로 무하는 제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광고 포스터, 달력, 그림 등을 많이 그렸습니다.

 

영국의 페르펙타 자전거 광고 포스터 1902, 영국 자전거 브랜드의 프랑스내 진출을 위해 만들어진 광고 포스터

 

 

알폰소 무하가 그린 향수 '로도' (좌), 모나코 공국의 관광 홍보 포스터 (우)

 

이렇게 아르누보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스타일이 되어버리자  반대로 대중의 관심은 급격히 식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시작될 1차 세계대전 전쟁 분위기에 맞추어 새롭게 등장한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심플하고 기능적이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직선미와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르 데코가 시작됩니다. 

 

 

 

조국으로 귀국해 완성한 슬라브 서사시

알폰소 무하는 체코 출신인데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스타 화가이자 당시 가장 성공한 체코인 중 한 명이었지만 무하에게는 나라 잃은 슬픔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공한 화가로서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태어나고 소속해 있는 슬라브족의 자부심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대작을 꿈꾸는 그에게 미국에서 만난 글로벌 기업인이자 외교관인 찰스 크레인이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무하는 후원을 약속받는 데로 체코 프라하로 돌아가 자그마치 20년 동안 <슬라브 서사시 Slovanska epopej>를 완성합니다. 

총 20장, 가로 8m, 세로 6m/ 가로 4.8m, 세로 4.05m 등 모두 대작들이었습니다.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고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담아내고 있습니다.

스무 점의 연작 중 절반을 체코 민족의 역사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슬라브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이 연작을 1928년에 완성하였고, 후원자 크레인과 뜻을 모아 전 작품을 프라하 시를 통해 체코 민족에 기증했습니다.

 

 

 

반응형

댓글